etc.
러셀 메넨데즈(Russell Menéndez)
본명.
출신지:니카라과 공화국
어린 시절은 복잡했다. 친부가 조직의 간부였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그는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여러 위탁가정을 전전했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서야 친부와 재회하게 된다.
열다섯 살, 치기 어린 선택이었다. 친부를 찾아간 일은 그의 인생을 비틀어 놓은 결정적인 사건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다만 정작 그는 자신의 삶이 꼬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평범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 그런지는 스스로도 따져 본 적이 없다. 철학적인 성향은 아니고, 깊은 사유를 즐기는 편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살아온 시간이 길어 의외로 상식은 갖추고 있다. 다만 그 상식은 ‘지식’에 가깝다. 그는 그 틀 안에서 범죄자들의 도덕성을 재단하고, 그 과정에서 일반인과 범죄자 사이를 오가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한다. 물론, 그 사실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문제는 본성이다. 타고난 성정이 워낙 악질이라, 상식과는 별개로 사람을 긁어대는 언행이 몸에 배어 있다. 특별한 악의가 있어서도, 누군가를 괴롭히는 데서 즐거움을 느껴서도 아니다. 그저 그런 성격일 뿐이다.
그는 자신이 모순적인 틀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모순을 지닌 타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오히려 집요하게 파고들고, 캐묻고, 괴롭힌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괴팍함과 뒤틀린 내면을 타인에게 투영하며, 어떤 본능적인 만족을 느끼는 듯하다.
모순과 악의, 그리고 강한 자기애에 기반한 편파적인 판단들.
의형제였던 양자를 경쟁자로 규정하고 저지른 첫 살인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 그 살인은 생존을 위해 필요하지도 않았고, 필연적인 선택도 아니었다. 다만 그의 왜곡된 판단과 자기애가 불러온 결과였다.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기이한 성격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성격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자신의 행동이 일반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고치려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편파성과 기이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결국 그의 삶을 밀어붙이는 동력은 자기애와 왜곡된 판단이다.
연극성 성격 장애?
다정함은 연기일까, 아니면 본래의 성격일까. 어느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연극으로 점철되었다. 다정함이든 무엇이든 연기하지 않으면, 본래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흐릿해질 정도다.
그는 자신이 가장 모순적이라 여겼던 범죄자, 그리고 자신을 비정상이라 인식하게 만든 존재—자신이 죽인 양자의 흔적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그 범죄자가 행하던 기도나 고해성사를 가끔 흉내 내기도 한다. 이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 깊이 각인된 이미지에 가깝다. 물론 신앙은 아니다.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차용해 연기에 활용할 뿐이다.
그에게 연기는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자 모티브의 집합이면서, 동시에 본래의 자신을 무너뜨린 수단이기도 했다. 그의 이질적인 성격과 모순된 내면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적 행위다. 그는 배우처럼 살아가며, 필요에 따라 다양한 모티브를 끌어다 역할을 완성한다. 그러나 그 연기에는 뚜렷한 목적도, 이유도 없다.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모든 성격과 행동은 배우의 그것처럼 연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가 다정한 사람인 척하는 이유도 단순하다. 그게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을 기만하고 있지만, 정작 그는 그것을 기만이라 여기지 않는다. 연기하는 삶이 자연스러워졌지만, 그 이질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때로는 행동과 내면 사이의 괴리가 크게 벌어지기도 한다.
냉혹한 순간에도 연기를 멈추지 않으니, 예로 “너를 많이 아꼈는데... 슬프구나”라고 말하며-물론 말로만 뱉는건 쉽겠다. 허나 알도 말디니가 뱉어내는 문장은 누가보아도 안타까운 어조에 가깝다. 눈물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흘려주랴- 주저 없이 상대를 죽이는 행동에서 그 이질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연기는 타인에게 혼란과 공포를 남기고, 그 자신에게는 끝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자아를 남긴다. 결국, 그는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속임이 그의 본질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