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삭막한 세상에 너는 밀물처럼 들이찼다.
한 때, 과거의 세상이 바닷물에 잠겼듯. 서서히.
칼립소.
정신적 고립을 의도하고, 그렇게 키워져 의도된 존재로 자라는 곳.
어쩌면 자신 또한 그에 의도된 이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허나, 넌.그저 쓸데없는 것이라 여겼던 것들을 상기시켰다. 다가오는 네게 빙돌려 거절을 건냈음에도. …통하지않아 곤란했던 순간을 기억해낸다. 그러곤 기껏 내보인 감정의 편린을 그저 대련으로 치부시킨 일과 그렇게, 켜켜히 쌓여온, 헛웃음이 웃음으로 변하던 순간의 기억들, 그 모든 것을 기억한다.
…
끝내 밀어내지 못한 것은 그 자신의 의지였다.
우린 서서히, 우정의 형태를 갖췄고, 때를 지나 부대에 들어섰을 때 그 형태를 확고했다. 그것은, 그렇게 우리 사이에 변하지 않을 명제가 되었다.
관계라는 것을 누군가 맺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 의지가 닿는다면그 기점에 이미 관계라는 것을 정의한 것이다.
다만 해리스 캄벨이 그것을 배우고, 깨닫고, 받아들이기까지 남들보다 오랜시간이 걸렸으니. 그렇기에 서툴렀던 것인지,싶다.
후회는 어떤식으로 뱉어내야하는가. 마냥 뱉어내는 것은 그저 쉬운 일이니, 뱉어내선 안될 것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언어는 너무 쉽고, 그러니 물음에 답할 수 없다. 일순 쏟아질 것만 같은 것들을 꾸역꾸역 집어삼킨다. 용납하지 못하는 널 보는 것이 어쩌면 괴롭다. 그저, 밀려온 파도처럼. 턱밑까지 차오른 것들에 숨통이 조여오고 있다. 언젠가, 제가 완전히 잠겼을 때 그때는, 말하게 될것이다. 그런, 짐작만을 한다.
로먼의 죽음은 그저 얼핏 느끼기만 하던 감정을 형태로 불러일으켰고, 그로인해 두려움을 인지했다. 남들이 진작에 느껴왔던 감정들이 한번에 밀려와 버거운걸까 싶다.
현재와 과거의 경계선에 걸쳐져. 레노를 바라보고 있다. 형제이기에 겹쳐보는 걸 수도 있지만, 그를 통해 로먼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두려워함에 가깝다.
정의할 수 없는 모든것들을.
…너마저 잃는다면, 이번엔, 정말 말라,죽어버릴지도 모르지. 그런 기분이 들어.
긴 평화 속에서, 해리스는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방황하고, 뱉지못한 말들은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음에도. 결국 시간의 흐름은 그를 변화시켰으리라. 어느 날, 레노가 그의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깨달았다. 이제는 자신이 먼저 다가가야 할 때라는 것을.
또 한번의 시간이 흘러, 그리고 마침내, 그 말.
“연인은 싫어?”
네가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안에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마치 오래된 자물쇠가 풀리듯.
깨달았으리라. 더 이상 너를, 친구로만 볼 수 없었음을. 지켜야 할 존재, 소중한 동료를 넘어 해리스에게 훨씬 더 특별한 존재가 되어.
“내 마음은 변치 않아.”
그들의 관계는 조금씩 변해왔다. 여전히 전우였고, 동료였으며 친우였지만, 이제는 그 안에 사랑이 스며들었다. 둘은 서로의 곁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겨울에 멈춰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하얀 눈이 대지를 덮었다. 세상은 고요하고, 모든 것이 멈춰 있는 듯 보였다. 그 겨울 속에서, 해리스 캄벨도 한동안 그 고요함 속에 자신을 묶어두었다.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을 닫아두었다.
그러나 이제, 해리스는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던 차가움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그 온기는 너로부터 피어났으니. 그렇게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았던 네 덕분에, 아. 이제 더 이상 춥지가 않다.
이제 해리스는 혼자가 아니다. 그의 곁에는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네가 있으며, 해리스는 그 손을 잡았으니. 그 순간 얼어붙은 세상 속에서도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그들만의 따뜻한 온기가 퍼져나갔다.
그들의 관계는 이제 더 이상 억눌리지 않았다. 그들은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따뜻한 빛을 발하며, 함께 걸어갔다. 해리스는 더 이상 고요함 속에서 자신을 묶어두지 않았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봄이 찾아왔으니.